기술과 데이터 기반의 NGO, 인도주의를 다시 정의하다
- 7월 8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일 전
국제구조위원회(IRC)가 선도하는 예측형 대응과 시스템적 연대

이은영 국제구조위원회(IRC) 한국 대표
기후위기, 분쟁, 전쟁—세상이 흔들릴 때, 누군가는 그 최전선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IRC(국제구조위원회)는 긴급구호를 넘어, 기술과 글로벌 파트너십을 통해 더 복합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NGO 모델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AI 기반 조기 대응 시스템, 민간기업과의 협력, 디지털 플랫폼 구축까지. 이젠 단순한 지원을 넘어, 위기 속 사람들의 자립 가능성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전환의 한가운데에서 한국 IRC는 어떤 길을 만들고 있을까요?
아시아에서 최초로 설립된 IRC 한국 지부의 이은영 대표에게, 남수단과 우크라이나 등 현장 경험부터 기후위기 대응, 기술 파트너십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책임감으로부터
🎤 현재 일하고 계신 기관의 설립 배경이 매우 인상 깊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저희 기관은 1933년, 나치 독일의 탄압이 극심해지던 시기에 설립되었고, 올해로 92년째가 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한 후, 자신은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유럽에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지식인, 예술가, 철학자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당대의 지식인과 사회 지도층 인물 51명을 모아 지금 국제구조위원회의 전신이 된 ‘국제구호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치로부터 유대인 지식인들을 구출해 망명시키는 활동을 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 난민들을 지원하는 세계 최초의 민간 구호기관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설립자들이 특별히 부유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았으니, 아직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라는 책임감에서 출발한 조직이라는 점이 저에게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물이 마르고, 다시 잠길 때
🎤 최근에는 기후 위기로 고통받는 지역도 많아졌는데요. 현장에서 직접 마주한 사례가 있다면 공유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남수단에서의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5년 가까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이어졌는데, 그 뒤엔 갑작스러운 폭우와 홍수가 덮쳤습니다.
땅이 너무 오랫동안 말라 있다 보니, 비가 내리자 흙이 물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쓸려 내려갔죠. 제가 방문했을 때는 2년 전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침수된 마을이 아직도 물에 잠긴 상태였어요. 집도, 학교도, 밭도 모두 물속에 잠긴 채였고, 주민들은 그 옆에 천막을 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농업에 생계를 의존하는데, 이런 기후의 극단적인 변화가 반복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회복이 불가능해집니다. 현장을 보면서 “기후위기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삶의 존엄에 관한 문제다”라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재난을 기다리지 않는 기술
🎤 그런 기후 재난 앞에서, 국제구조위원회(IRC)는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나요?
저희는 기업 파트너십을 통해, AI 기반 기후 예측 프로그램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특정 지역에 언제, 얼마나 많은 강우가 예상되는지 예측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지역 농부들에게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현금을 미리 지급해 사전 대응이 가능하도록 돕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이 혁신적인 이유는, 우리가 흔히 재난이 발생한 후에 ‘바우처’나 ‘키트’를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재난 이전에 자발적인 사전 대응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도 태풍이 올 때 비닐하우스를 수리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당장 여유가 없으면 손쓸 수 없는 상황이 생기곤 합니다. 남수단에서도 마찬가지로, 농부들이 현금을 미리 받아 미리 대비책을 세울 수 있다면 훨씬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고, 결국 자립 가능성도 높아지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 전쟁이나 분쟁 지역에서, 기술이 사람의 생명을 지켜낸 순간이 있었나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지원 프로젝트입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난민들이 국내외로 피난을 갔는데,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탈출이었고, 어디서 어떤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죠.
이때 앞서 언급드린, 글로벌 파트너들과 함께 만든 ‘사인포스트(Signpost)’라는 디지털 정보제공 플랫폼을 활용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쉘터, 의료센터, 법률 지원 서비스 등의 위치와 연락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또한 챗 기반 상담 기능도 포함돼 있어, 언어가 달라도 상담을 받으며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플랫폼은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디지털 생존 지도’ 역할을 했습니다. 난민들은 여행자가 아니라 생존자이기에, 이 정보는 곧 생존력 그 자체였죠. 테크 기술이 인도주의 현장에서 어떻게 ‘도구’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기술과 브랜드의 언어로 확장되는 인도주의
🎤 다양한 분야의 글로벌 파트너들과 협업하고 계신데요. 어떤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맺고, 각각 어떤 기여를 하고 있나요?
네, 지금까지 저희는 젠데스크, 레고 재단, 그리고 세사미 워크숍 같은 글로벌 브랜드들과 협력해왔습니다.
그리고 젠데스크는 위기 상황에서 도움이 필요한 저희 대상자들이 정보를 주도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커뮤니티 기반 정보 시스템인 ‘사인포스트(Signpost)’의 확장을 지원했습니다. 이 외에도 Tech for Refugees, 메타 등 여러 국제구조위원회 파트너들이 이 프로그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주었습니다.
레고 재단과는 협력하여 동아프리카,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세서미워크숍과의 협업 포함),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위기 상황에 처한 어린이와 보호자들에게 놀이를 통한 학습을 제공함으로써, 삶에 필수적인 역량을 기르고 정신 건강과 회복탄력성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세서미 워크숍과는 중동 지역의 분쟁 및 위기 상황으로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이 배우고, 성장하며,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돕는 조기 아동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각각의 기업들이 가진 기술력과 브랜드 정체성을 활용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인도주의 활동을 확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라 생각합니다.
기부금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기업의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점, NGO의 실행력이 강화되고, 기업은 자원과 기술로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협업 모델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이러한 글로벌 파트너들과의 협력이, NGO 활동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이 협력이 NGO의 역할이 단순한 물자 전달을 넘어섰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위기 상황에선 정보 자체가 곧 생명이며, 난민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안전을 확보할지 아는 것이 핵심 자원이 됩니다. 저희는 식량이나 담요를 넘어서, 난민이 스스로 올바른 경로를 선택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디지털 시스템을 구축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이동한 난민 가족을 떠올려 보세요. 언어도 낯설고, 어디가 안전한지도 모르는데, 앱을 통해 실시간으로 “가장 가까운 여성 보호센터는 어디인지”,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의료센터는 어디인지” 알 수 있다면 그들의 두려움과 혼란은 줄어들고, 이동은 훨씬 안전해집니다.
이런 기술 기반 협력은 앞으로 기후위기, 분쟁, 대규모 재난 등 예측 불가능한 위기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NGO의 새 모델이라고 봅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바로 그 전환의 중심에서, 기술과 인도주의를 잇는 연결자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한국 기업들과의 협업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네, 저도 매우 기대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는 농업, 스마트 기술, 헬스케어 등 뛰어난 역량을 지닌 기업들이 많습니다.다만 아직까지 이러한 기업들이 인도주의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는 많지 않은 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한국 기업들과도 충분히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팜 기술을 활용한 식량 위기 대응 모델 개발이나, 데이터 기반 재난 대응 솔루션 설계 등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제가 앞으로 몇 년 안에 꼭 추진해보고 싶은 분야이기도 합니다.

행동으로 이끄는 정보의 힘
🎤 국제구조위원회(IRC)의 홈페이지는 마치 전문 저널처럼 깊이 있는 콘텐츠가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정보 중심 콘텐츠에 집중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희 홈페이지를 처음 접한 많은 분들이 “마치 뉴욕타임즈를 보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요. 실제로 국제구조위원회는 저널리즘적인 톤앤매너와 깊이 있는 정보 중심의 콘텐츠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런 딱딱한 정보가 과연 한국에서 통할까?’ 걱정도 했지만, 요즘은 기부를 결정할 때 정보의 깊이와 신뢰성을 중시하는 분들이 확실히 늘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구조위원회가 발행하는 세계 위기국가 보고서, 긴급 대응 분석 아티클 같은 콘텐츠는 처음엔 어렵게 느껴진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점점 더 많은 학생, 청년, 학부모들이 꾸준히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보다 오히려 실제 이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전문성을 통해 신뢰를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주 최소 1~2건의 글로벌 위기 관련 아티클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고, 광고 없이도 구글 검색 상위에 노출될 만큼 아카이브도 탄탄한 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콘텐츠 그 이상으로, 기부로 이어지는 ‘지적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데이터와 정보 중심 콘텐츠가 실제로 기부로 연결된 사례가 있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기후위기를 주제로 공부하던 중 저희 홈페이지의 관련 아티클을 우연히 발견한 일이었습니다. 그 아티클을 통해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현실을 체감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기부를 결심했고, 실제로 해당 학년 몇 반 이름으로 기부금이 전달됐습니다.
저희가 따로 광고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 학교와 연결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검색을 통해 저희 콘텐츠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 커뮤니케이션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구나”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에게는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행동으로 옮긴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에게도 이것은 기부를 확산시키는 새로운 구조 즉, 관심에서 학습으로, 학습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확인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경계 너머의 연결
🎤 앞으로 국제구조위원회는 어떤 역할을 계속 해나갈까요?
저희 같은 국제 인도주의 기구는 국경을 초월한 생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 재난, 기후 위기로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기 어려운 이들이 전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런 현장에 동시에 대응해야 합니다.
저희는 기부를 ‘선택’이라기보다는 관심의 확장에서 시작되는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선에 더 많은 분들이 설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국제구조위원회가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야 할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지금은 단순한 연민을 넘어,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위기에 처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시대입니다. 기술이 있는 사람은 기술로, 자원이 있는 사람은 자원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 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남겼던 질문처럼,
“내가 안전하게 살아남았다면, 구조되지 못한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분명히 바뀐다고 믿습니다.
🔗 국제구조위원회 홈페이지 : https://www.rescue.or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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